EP 1 - 00“DIVE INTO THE NEW ORIGIN”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각자 가지고 있는 희끄무레하고 모호한 형태의 창의적 세계는, 그 창의로움이 창작자를 즐겁게 하기도, 모호함이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남자는 어느 날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너머의 사람은 자신을 ‘PEA’라는 단체에 소속된 엔지니어라 밝혔고, 남자에게 창의적 사고의 잠재의식 세계로 접속하는 장치와 실험에 대해 이야기를 한참을 쏟아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접속의 과정을 ‘다이빙’, 창의적 잠재의식 속의 세계는 ‘오리진’이라 표현했다. 남자는 문득 늘 갖고있던 새로운 형태와 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머릿속에 담긴 모호한 뉘앙스와 그를 구체화하여 표현하는 명확함, 그 둘을 모두 충족시키고 이어나가기엔 상상과 생각만으로는 늘 부족하다 느껴왔다. “직접 나의 잠재의식 속 창의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설명을 마친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몇 초간 침묵한 뒤 남자에게 조심스레 프로젝트에 참가해 볼 것을 제안했다. 남자의 잠재의식 속 창의세계로의 탐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EP1 – 01‘POST-EQUIPMENT ASSOCIATION’ PEA의 사무실에 도착한 남자를 맞이한 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를 가진 한명이 다가와 남자에게 PEA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계, 꿈을 기록하는 장치와 같은 통념적이고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허무는 새로운 개념의 장치들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단체이며 이번 프로젝트 역시 그 일환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는 남자에게 ‘다이빙’의 위험성에 대해 일러주었지만, 모호했던 머리 속 창의적 세계의 모든 것들이 이제 곧 눈앞에 펼쳐진다 생각하니 남자의 뇌는 도파민으로 가득차 그의 당부는 남자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프로젝트 참여에 동의하냐는 그의 마지막 물음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는 대답을 마쳤고. 곧바로 ‘다이빙’ 장비로 향했다. 잠재의식 다이빙 장비는 대체로 검정 빛을 띄는 금속물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직육면체 형태의 내부와 내부의 겉부분을 감싸는 얇은 쉘은 테두리가 반타원 패턴 으로 예리하게 깎여있는 형태였고 쉘은 지지대와 볼트,너트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장치의 안쪽 가운데에는 PEA의 로고가 발광하고 있었고, 남자는 홀린 듯 로고 위에 몸을 뉘였고. 장치에 닿은 몸의 일부와 손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곧 잠에 들듯 눈이 감겼다.
EP1 – 02남자는 눈을 감자 마자 어지러움과 몸의 미묘한 변화들을 느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눈을 뜨지 않았지만 시신경이 활성화 되는 듯 선명하게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커다란 구조물들과, 낯선 공간이 보였다. 중력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허공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한 생경한 느낌이었다. 시시각각 주변의 상황이 변하기도 멈춰 있기도 하는, 시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에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주를 걷는 것 같기도, 다른 차원을 경험하는 것 같기도 한 기분을 느끼던 차에 남자의 눈 앞에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이 거대한 홀은 마치 강한 중력을 가진 블랙홀같이 남자를 물리적, 정신적으로 끌어당겼고 그는 홀린 듯 이끌려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다시 잠에 들 듯 정신을 잃었다.
EP1 – 03눈을 떴다. 혹시나 몸에 이상이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둘러본 남자는 평소와 다를 게 없음을 느꼈다. 잠재의식 다이빙 장비에서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던 날카로운 기계음이 어느 순간 멈추며 적막이 찾아왔고, 남자는 안도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주위의 낯선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PEA의 사무실 또는 우주같은 초현실적 공간은 온데간데 없고, 커다랗고 하얀, 그 느낌이 신성하기까지 한 숭고하고 웅장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천천히 장비에서 나와 공간의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 특이한 건축물은 꽤나 복잡했다. 낯설고 생경한 풍경은 공간 안에서 공기의 흐름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그를 긴장시켰다. 남자는 여러 통로와 방을 지나 얕은 바람과 바깥 공기가 느껴지는 출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잠재의식 세계가 혹시 탈출할 수 없는 무한한 ‘림보’가 아닐까?, 혹여 출구를 찾지 못할까?,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진 않을까? 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남자는 금방 빛과 바람이 들어오는 출구를 찾았고, 출구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EP1 – 04“ 출구다 “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니 바깥의 마른 공기가 느껴졌다. 계단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남자의 눈 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잠재의식 세계는 특이한 형태의 구조물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남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현실세계와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저 멀리 산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괴상한 도시는 남자로 하여금 미묘한 다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는 잠재의식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같이 느껴졌다. 드넓은 대지와 저 멀리 보이는 산의 중간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외롭게 서있었다. 출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은 나무쪽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자연스레 길을 따라 나무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이 나무로 보이는 것에 대해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무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으며 가지를 움직이며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공중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EP1 – 05“쉬이이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들과 함께 남자는 나무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다. 가까이에서 본 나무는 마치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잎이 셀 수 없이 많이 달려있었고, 줄기를 이리저리 흔들며 날카로운 잎들을 세차게 흩뿌리고 있었다. 공기를 찢으며 흩날리는 잎은 정말 위험해 보였고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나무와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잎을 몇 개 주워서 확인했다. 잎은 굉장히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고 모서리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쇠 끼리 부딪히는 기괴한 소리를 내는 커다란 나무와, 날카로운 칼날잎을 보고 있자니, 이 알려지지 않은 무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 남자의 머릿속에서 피어난다. 잎이 쓸모가 있을거라 생각하며 땅에 떨어진 적당한 크기의 칼날잎 세 개를 챙겨 대충 고리로 엮어 허리춤에 찼다. 두려움과 설렘이 혼합된 복합적인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남자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